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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정리] 1차 왕자의 난과 이방원의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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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 초기의 정치 과정과 맞물린 이방원의 위상 변동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은 왕조를 개창한 지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에 이방원을 따돌린 채, 치밀하면서도 급박하게 세자 책립과 개국공신 논의를 진행하면서 그를 무력화시키는 일련의 정치적 과정이었다.

 


이방원은 개국한 다음 날 태조에게 가별치를 하사받고 국정에도 참여하였으나 태조는 그를 동북면으로 보내놓고 전라도절제사로 제수하여, 같은 날 친군위절제사로 삼아 동북면을 맡긴 이방번에게 가별치를 양도하게 만들었다. 이방원이 공신에서 배제되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비록 전라도절제사라는 직함을 가졌지만 이방원은 권력에서 추락하였다.


 

그가 권력에서 배제된 원인은 흔히 알려져 있는 성격의 잔혹성이나 정치적 야심에 대한 경계가 아니었다. 개국 직후 현비(顯妃) 강씨가 외척을 내세워 이방원과 태조의 접촉을 차단하면서 자신의 소생을 세자로 책립하는 것을 추진하였고 그것을 태조가 수용한 결과였다. 공신들은 이미 태조의 뜻을 알아 반대하기도 어려웠지만, 정국에서 이방원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굳이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치권력에서 배제하면서도 태조는 자신의 천도(遷都)작업을 위해 이방원을 조력자로 두었다. 이것은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천도 작업이 대신들에게 미온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이방원을 내세워 위기를 극복한 적도 있었다. 태조 2년부터 조선을 위협하기 시작한 명나라에서 말을 보낼 것과 해적 사건의 범인을 아들로 직접 압송하여 입조할 것을 요구한 일이었다. 여기서 태조는 이방원을 적임자로 여겼으며, 이 현안은 잘 해결되었다.


 

정도전의 군제 개혁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전라도절제사인 이방원이 14세에 불과한 이방번의 좌군에 소속되어 있다는 구도를 만들었고 이방원은 굴욕감과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다. 또한 그 같은 군제 개혁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권력을 박탈하면서도 어려운 국면에는 자신을 이용하는 듯한 태조에 대한 이방원의 원망과 분노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1차 왕자의 난이 촉발되는 한 근원이 되었다.

 




논문 저자의 논평

세자 이방석이 즉위한다면 아직 충유(沖幼)한 그를 대신하여 국정을 볼 사람은 정도전이었다. 그렇게 될 경우 그가 이방원을 비롯한 동모(同母) 형제를 제거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었다. 따라서 막다른 상황에 몰린 이방원이 가졌을 절박한 위기감은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비록 이모제(異母弟) 등을 살해하는 패륜(悖倫)을 저지르고 결과적으로 정권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 하더라도 1차 왕자 난을 전후한 시기의 이방원을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한다.

 






한춘순, 태조(太祖) 7()(1398) "1차 왕자 난"의 재검토, 조선시대사학보, 2010.

http://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1a0202e37d52c72d&control_no=8e1cccadc0276630b36097776a77e665&keyword=1%EC%B0%A8%20%EC%99%95%EC%9E%90%EC%9D%98%20%EB%82%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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